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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의교회

나눔의 교회 - 제자대학

예배하는 사람

제자반 2005.11.10 08:04 조회 수 : 3897

[요 4: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여러분, 예배 시간이 지루하게 느껴지지는 않습니까? 기념식처럼 형식적이라고 느껴지지 않습니까? 끝나는 시간이 조금만 늦어져도 시계를 보게 되고, 찬송가가 4절짜리만 되어도 신경쓰이지는 않습니까? 요즘 영적으로 깨어나는 중국 교회는 3시간, 4시간씩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중국 가정교회에는 99절짜리 찬송가도 있는데, 은혜가 되면 두 번도 세 번도 더 부른답니다. 부흥이 임한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너무나 많은 예배를 드리지만, 예배를 진정 기뻐하는 성도들을 찾아 보기 어렵습니다. 예배는 묵도부터 축도까지 천편일률적으로 진행이 되고, 사도신경, 주기도문을 외우거나 찬송을 부를 때, 생각은 따로 겉돕니다. 예배 분위기가 언제나 무거워서, 10대 20대에게는 무거운 짐이 되어 버렸습니다. 많은 경우에 "예배부터 간단히 드립시다!" 하고 말합니다. 예배가 큰 의무이지, 큰 기쁨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미국 어느 교회 설교단에 조그만 메모지가 붙어 있었답니다. "설교를 짧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다시 이 강단에 청함을 받을 것임이요" 실제로 그런 교회가 있는지 모르겠으나, 현대 교인들의 심리를 잘 말해 주는 이야기입니다. 부흥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란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이 만남이 즐거운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예배가 즐거워지는 것이 부흥이 임한 가장 큰 증거입니다. 예배란 하나님을 즐거워 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을 즐거워 할 때,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도 즐거운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에는 하나님을 즐거워 하는 마음이 식어져 있습니다. 하나님 보다, 돈이 더 즐겁고, 권력이 더 즐겁고, 학벌이 성공이 더 큰 힘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보다 일을 더 즐거워 합니다. 그러므로 예배에는 불이 임하지 않습니다. 예배드릴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영혼이 순수하다는 말입니다. 예배를 드릴 수 없다는 말은 그만큼 우리 영혼이 타락했다는 말입니다. 롬 1:28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몇 해전 오늘날 미국에서 급성장하는 교회를 탐방하였을 때, 일정에 감리교회가 하나 있음을 보고, 큰 기대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를 찾아 갔을 때, 진행하시는 목사님께서 그 교회에 대하여 설명을 하시기를 "오늘 보시게 될 교회는, 이번 일정 중에 유일하게, 한 때는 크게 부흥하였지만, 교회 갱신을 이루지 못하여, 지금은 쇠퇴하게 된 교회입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부흥이 임하는 교회와 부흥이 사라진 교회는 예배부터 다른 것을 보았습니다. 예배당안의 공기조차 다르다고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저는 그 예배당 뒤 위자에서 머리를 숙이고, "하나님 저는 부흥이 임하는 교회에서 목회하고 싶습니다" 하고 눈물로 기도하였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마음, 예배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동안 한국교회의 예배에 대한 가장 큰 문제는 [주일성수]입니다. 우리는 예배시간에 참석하면 "예배 드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닐 수 있다는데, 문제가 심각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하였는데,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받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할까요? 하나님께서는 속도 좋으신 분이라, 아무렇게나 예배해도 다 받으시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우리의 자세 때문에 마음 아픈 것이 많으심을 알 수 있습니다. 최근 예배가 달라지고 있습니다! 특히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예배의 영적분위기는 분명히 달라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부흥의 조짐입니다. 97년 말, 온천 장로교회(고신)에서 드려진 학복협 헌신예배는 드라마부터 시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예배는 기존 예배와 무엇보다 찬양이 다릅니다. 현대적인 음악을 과감히 찬양에 도입하였습니다. [경배와 찬양]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예배는, 미국의 오순절주의 교회에서 시작이 되었지만, 지금은 전세계적으로 가장 강력한 영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이 새로운 형태의 예배는 전통적인 예배가 지나칠 정도로 의식적이고, 신학적이어서, 예배하는 자들의 마음에 만족함을 주지 못하였기 때문에 [예배의 갱신]으로서 생겨났습니다. 물론 우려하는 시각도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다!" "예배는 경건해야지 쇼(show)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렇지만 우리가 지루해 하며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은 기뻐하실까요? 참고로 찬양의 역사를 살펴보면, 중세에는 찬양이 미소년들만으로 구성된 찬양대만 드릴 수 있었습니다. 회중은 찬송을 부르지도 못하였습니다. 종교개혁 당시, 예배가 개혁되었는데, 예배 때, 회중들에 의하여 찬송이 불려졌습니다. 물론 곡도 당시로 기준으로 현대화되었습니다. 모국어로 된 성경이 봉독되고, 모국어로 설교했습니다. 당시로는 혁명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예배 중에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회중들이 찬송을 부르는 과정에도 우여 곡절이 많았습니다. 루터는 찬송을 회중이 부르도록 적극적으로 개방했고, 회중들로 구성된 찬양대도 만들었는데, 단 남성들만의 찬양대였습니다. 이 자체가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시도였고, 논란도 많이 일어났습니다. 칼빈은 훨씬 보수적이라서 찬송 중에 단성부만 허용했고, 쯔빙글리는 무반주 곡만 허락했습니다. 여성이 찬양대에 선 것은 1774년 미국에서 최초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09년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최초로 혼성 찬양대가 섰는데, 그 전에는 물론 남자들만의 성가대였습니다. 그 때, 최초로 4성부로 찬양을 불렀는데, 듣는 회중들이 괴상한 소리(?)라고 못마땅해 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종교개혁은 예배에 있어서도 엄청난 변화를 가져 왔습니다. 그 중심 방향은 형식적인 예배를 벗어 버리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예배는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여러분은 예배할 때 이러한 경외감을 가져 본 일이 있습니까? 몇 년 전에, 캐나다 토론토 부흥회를 인도한 후, 토론토 근처에 있는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러 갔었습니다. 배를 타고 폭포 바로 앞까지 갔을 때, 저는 자연의 거대함 앞에서 절로 탄성을 질렀습니다. 그 웅대한 자연 앞에 서 있을 때, 신비하게도 제 마음과 생각이 새로워 짐을 느꼈습니다. 옆에 있던 제 아내는 묵은 모든 염려와 스트레스가 다 씻겨 내려 가는 느낌을 받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저는 이 체험이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자연이 하나님이라는 말이 아니라, 그 자연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경험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예배를 드릴 때, 이런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의 한 부분만 보아도 이런 놀라운 힘을 얻는다면, 하나님을 그 분을 만날 때는 어떻겠습니까? 캐나다 연합교회에 가 보니, 노인들만의 예배였습니다. 너무나도 웅장하고 멋있는 예배 의식이었지만, 거기에는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흥분이 없었습니다. 광복절 기념식 같은 예배였습니다. 그러나 광복절 당일에는 어떠했을까요? 너무나 질서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감격과 감동이 넘쳤을 것입니다. 일제에서 해방된 소식을 듣고, 어떤 사람이 똥간에 앉았다가, 만세 소리에 흥분되어 빠졌는데, 그래도 좋아서 웃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영으로 예배하라 ("... led by the Spirit to worship the Father") '영으로 예배하라'는 것은 "성령께서 역사하시도록 예배하라!, 성령의 역사가 느껴지는 예배를 드리라!"는 말입니다. 제가 어릴 때 예배를 잘 드리는 기준은 [떠들지 마!]였습니다. "예수님이 보시잖아" 예수님이 보시면 가만히 있어야 하는 것인줄로 생각했습니다. 선생님 중에 매를 들고 예배를 [감독]하는 분도 계셨고, 예배 중에 뒤로 나가서 벌서기가 예사였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목사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수없이 예배를 드렸지만, 예배를 드리면서도 솔직히 마음에서 우러나는 감사,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는 고백을 해보지 못했습니다. 서울 온누리교회, 목요찬양집회, 문을 열고 들어서지, 확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 눈에 들어오는 청년들의 모습, 손을 들고, 무릅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찬양하는 이들, 이것이 무엇인가? 불이 임하는 것이 아닌가? 예배가 지루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습관과 형식으로 예배하기 때문입니다. 예배 때 언제나 성령의 임재를 믿어야 하고, 성령의 역사를 예민하게 바라보며, 순종해야 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어떻게 하는 것이 예배를 보는 것이며, 어떻게 하는 것이 예배를 드리는 것인지 명확히 구분하지 못합니다. 대부분 예배를 위하여 하는 일이란 예배 시간에 맞추어 참석하는 것 뿐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그리스도인의 예배를 [극장의 비유]를 통하여 재미있게 설명하였습니다. 예배는 극장에서 공연하는 연극과 같은데, 문제는 관객이 누구이고, 배우가 누구라고 이해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배가 연극에 비유된다면, 목사와 찬양대는 배우이고, 자신은 관객인 줄로 생각하는 교인들은 [예배를 보는 자]입니다. 이 경우 교인은 지각을 해도, 일찍 나가도, 졸아도 연극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목사나 찬양대 뿐 아니라, 모든 교인도 배우이고, 오직 하나님 만이 관객이라고 생각하는 교인들은 [예배를 드리는 자]입니다. 이 경우, 교인은 지각을 하거나, 일찍 나가거나, 졸면 큰 문제가 생깁니다. 연극을 망쳐 버리기 때문입니다. 배우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연극을 위하여 모든 정성을 다 기우리고, 책임을 집니다. 진정으로 하나님께 그려지는 예배를 위하여 개인적인 욕구와 일정을 조종해야 합니다. 일찍 일어나야 하고, 시간을 지켜야 하고, 바른 자세를 취하여야 하고, 봉사하여야 하고, 서로 함께 하여야 합니다. 만약 당신이 예배 시간에 대표기도 순서를 맡았거나 독창을 부르기로 되었다면, 마음 자세가 어떻겠습니까? 정말 잘 감당해야 하고,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자세가 예배드릴 때마다 항상 있어야 [예배를 드리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당신의 기도와 찬송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한 집사님이 주일마다 찬양단의 한사람으로 섬겼는데, 늘 "무슨 옷을 입을까?" 고민이 되었답니다. 그러다가, 찬양을 하지않게 되었을 때, 그런 고민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크게 깨닫고 그 사실에 대하여 회개하였답니다. "제가 하나님을 의식하기 보다, 사람을 의식했었던 것 같아요!" 예배 시간 중 가장 중요한 순서는 어느 순서라고 생각하십니까? 많은 성도들이 설교를 꼽습니다. 예배 때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기 위해서, 예배드린다면, 동기가 잘못된 것입니다. 어떤 성도는 "목사님, 설교에 은혜받으려고 하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대답해 드렸습니다.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그 시간입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이름을 높여 드리는 그 시간입니다. 바로 그 시간에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설교는 그 다음 문제입니다." 예배 시간에서 설교 순서가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예배를 보는 사람입니다. 영국의 한 부인이 우연히 어느 교회에 왔다가 설교에 너무 은혜받았다. 그 다음 주일에 또 왔는데, 이번에는 별로 은혜가 안되었다. 목사님 왈, "지난 주일에는 예배를 드리러 왔었고, 이번 주일에는 설교를 들으러 왔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예배하지 않고, 설교만 들었던 적은 없었습니까? 사43:21에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지으신 목적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예배의 핵심은 드리는 순서인 찬양과 헌금시간입니다. 진정으로 구원받은 성도의 예배는 가만히 앉아서 구경하듯이 예배하지 못하고, 손을 들고 찬양하고 일어나서 경배합니다. 표현이 강하고 자유롭고 다양합니다. 미국에 갔더니 찬양시간에 복도에서 춤을 추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미국 [Church on the Way] 교회에서 예배드릴 때, 가장 은혜로운 시간은 찬양시간이었습니다. 백인도, 흑인도, 남미 사람들도, 우리 한국사람들도, 인종이나, 나이를 초월하여 찬양 안에서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높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천국은 이처럼 모든 인종이 함께 모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곳입니다. 미국 교회를 탐방할 때, 프라이스 박사가 시무하는 크렌쇼 크리스챤 센타의 주일예배에 참석했는데, 헌금시간이 30분 정도는 되었습니다. '헌금드리는 시간입니다. 준비한 헌금을 들어 보십시오' 그런데 온 예베당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헌금 드리는 것을 그렇게 기뻐하는 사람들은 처음 보았습니다. 하나님께 헌금 드릴 수 있다는 것을 정말 감사해 하였습니다. 같이 갔던 목사님들은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예배였습니다. [참 예배의 두 조건 ] 진리로 예배하라 ("... according to the truth ...") 예배와 찬양이 진리에 근거하지 않고, 감정을 자극하거나, 사람들을 조종하는 힘에 의하여 진행될 때, 잘못된 방향으로 빠지게 됩니다. 이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진리로 예배하라"고 하신 것은 말씀대로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대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진정한 의미에서 "진리로 예배하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예배의 기초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누구든지 예수님을 통하여서만 하나님께로 나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천국과 관련된 말씀이기도 하고, 예배와 관련된 말씀이기도 합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위에서 드려지는 예배 만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있는 참 예배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할 때, 가장 큰 걸림돌은 우리의 죄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과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 안의 죄의 장벽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보좌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카톨릭 교회는 미사를 드릴 때마다 성찬식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 기독교는 형식화된 성찬식보다는, 설교를 통하여 선포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통하여 더욱 분명히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고 믿습니다. 이것을 말씀의 성례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를 말로만 고백하지, 실제로는 무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몇년 전 <지방회>를 하는 데, 지방회원들 사이에 언쟁이 벌어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두 편으로 나뉘어, 서로 미워하고, 고성이 오고 가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회순 상 예배 시간이 되었습니다.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지 않았는데도, 모두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찬송을 부르는데, 눈물이 흐르고, 목이 매여 찬송을 부를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다투다가, 그대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까? "예배를 드려야 할 시간인데, 우리가 이렇게 예배드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해야 , 해결될 것이 해결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십자가를 붙잡은 사람이 드리는 예배가 아닙니까? 우리 안의 제단이 무너졌는지 점검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기준은 삶이 예배가 되고 있느냐?입니다. 예배드리는 시간은 충만한 것 같은데, 예배만 끝나면 불이 사라져 버리는 이유는 그 삶이 예배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배 시간만 영적으로 바꾸려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삶이 바뀌어야 예배가 온전히 바뀝니다. 첫째, 참 예배자는 하나님만 예배하는 자입니다. 몸은 예배하는 자리에 있어도, 실제로 다른 것을 예배하는 자가 많습니다. 부목사 시절, 안내를 서다 보니, 예배는 드리지 않고, 계속 주위만 두리번 거리는 수상한 청년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2층에 있는 한 자매를 보더니, 비로소 만족한 웃음을 띄우더니, 예배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척스미스목사님, 초년 목회시절에 어려운 사정이 생겨서, 돈을 마련해 주시도록 기도했는데, 어느 집사님이 전화하여, 돈을 송금했다는 말을 했을 때, 사모님과 춤을 추었답니다. 그 때, 마음에 떠오르는 말씀이 있었는데, "너, 너무 좋아 하는 것 같구나! 나를 인하여는 그렇게 기뻐해 본 적이 없지 않느냐?" <질문> ① 당신의 충성을 누구에게 드리고 있습니까? 하나님입니까? 사업입니까? 직장입니까? 취미입니까? ② 무엇이 당신을 기쁘게도 하고, 슬프게도 합니까? 하나님입니까? 돈입니까? 사람입니까? 세상 성공입니까? 둘째, 참 예배자는 감사하는 자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믿으면, 어떤 형편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영적 욕구에는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때때로 몸이 아프거나, 마음이 괴로울 때, 예배드리고 싶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은 언제나 주님께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천국과 지옥이 갈라서는 자리에서 설 때, 우리는 어떨까요?> "내가 어떻게 천국으로 가는 길에 섰나?" 생각할수록 감격스러울 것입니다. "아!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이구나! 예수님의 보혈 때문이구나!" 그 때 그 자리에서 찬양하고 감격하고 감사하고, 노래하지 않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돈 없어 고생한 생각나겠습니까? 병들어 고생한 생각나겠습니까? 마음이 내키지 않아도, 몸이 피곤해도, `마음의 짐을 다 내려 놓고, 잠잠히 영을 따라, 십자가의 은혜를 누리며,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며, 예배하면, 우리 마음도 육신도 충만해 지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실제로 예배를 드릴 때, 성령의 능력과 은사들이 나타나, 우리의 모든 문제가 해결받습니다. 예배 때, 구원이 임합니다. 인간관계, 질병, 시험, 고난, 사명의 문제가 해결받고, 놀라운 코이노니아를 경험하게 됩니다. 셋째, 참 예배자는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입니다. 넷째, 참 예배자는 순종하는 자입니다. 다섯째, 참 예배자는 성도들과 한 마음이 될 수 있는 자입니다. 여섯째, 참 예배자는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린 자입니다. 일곱째, 참 예배자는 지극히 작은 자를 섬기는 자입니다. 여덟째, 참 예배자는 일보다, 먼저 예배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예배에 대하여 바로 깨닫지 못하였을 때, 예배는 제게 하나의 일이었습니다. 예배드릴 때도 머리 속에는 일에 대한 생각만 했습니다. 누구는 왔고, 누구는 안 왔고, 안내는 어떻고, 마이크는 어떻고, 찬양대는 어떻고, 예배 시간 내내 일만 생각합니다. 당연히 예배를 드려도 충만함이 없었습니다. 힘은 더 빠지는 것입니다. 저 자신에게 있어서 하나님 제단이 무너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예배 시간에는 하나님만 바라 보았습니다. 저 자신이 진정으로 하나님께 찬양하며, 감사하며, 고백하며,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누렸습니다. 그랬더니 예배를 통하여 모든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교인들도 힘을 얻었습니다. 교회의 제자훈련, 전도, 선교회 등, 다른 모든 일에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가정이 회복되었습니다. 제 안에 하나님의 제단이 복구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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